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끝자락, 도로 표지판조차 없이 바다로 스며드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어느 순간 포장도로가 끝나고, 풀과 모래, 그리고 바람의 세계가 시작된다. 현지 사람들 사이에서 ‘무명해안’이라 불리는 이곳은 정식 명칭조차 없는 채 수십 년간 조용히 숨을 쉬어온 해안이다. 지도에서 찾으려 하면 마치 바다가 일부러 숨겨놓은 듯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렵다. 필자가 이곳을 처음 찾은 날은 늦여름 오후, 하늘은 연한 파랑과 금빛이 섞인 그라데이션을 띠고 있었다. 해안가에 서면, 눈앞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얕고 맑으며, 그 위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물결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드론을 띄워 내려다본 풍경은 더욱 놀라웠다. 몽돌과 바위밭이 만들어낸 곡선형 해안선이 바다의 색을 네 겹, 다섯 겹으로 바꾸고 있었고, 그 경계마다 햇빛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였다.
무명해안의 지명과 그 안에 담긴 역사
‘무명해안’이라는 이름은 공식 명칭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바위밭 끝’ 혹은 ‘작은 곶’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의 해안 방어 지도에도 이 구역은 단순히 ‘암반지대’로 표기되어 있어, 항해자들에게는 피해야 할 장소로만 알려져 있었다. 어민들은 여기서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이유는 바닷속에 바위가 많아 그물이 쉽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이 해안은 조개와 전복, 소라를 채취하던 장소로 전해진다. 필자가 마을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는 웃으며 “여긴 이름 붙이면 사람들이 몰려서 금방 변해버릴 것”이라며, 무명의 상태로 남겨두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 말 속에는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자연을 지키고 싶은 마을 사람들의 지혜가 숨어 있었다.
바다의 소리, 바위의 향, 바람의 촉감
무명해안의 가장 큰 매력은 ‘감각의 완성’에 있다. 바닷물은 파도가 들어올 때마다 몽돌과 부딪혀 유리구슬 굴러가는 듯한 소리를 낸다. 그 청아함은 마치 대나무숲의 바람 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코끝에는 바위틈에 붙은 해조류에서 나는 은은한 바다 향이 스민다. 발밑에는 자잘한 조개껍질과 몽돌이 섞여 있어, 걸을 때마다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번갈아 전해진다. 여름의 한낮에도 이곳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기 전에 사라진다. 파도에 발을 담그면 놀랄 만큼 차갑고 맑아,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시원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해가 바다로 내려앉는 노을지는 저녁 무렵이다. 붉고 주황빛 노을이 바다 위를 덮을 때,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바다가 하루의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겨진 포인트를 추천하고자 하는데 첫째, 마을 뒤편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산책로다. 길 끝에는 바위밭으로 바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어, 인적이 드문 조용한 구역에 도착할 수 있다. 둘째, 북쪽 끝 곶을 돌아 나오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여기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수영장 같은 바위 웅덩이가 있어, 여름철 아이들이 안전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셋째, 남쪽 방향의 바위 너머 숨은 조개 채취 포인트다. 밀물이 빠진 뒤 1~2시간 동안만 잠깐 드러나는 이 구역에서는 작은 고둥과 소라, 종종 전복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마을 규칙상 채취는 하루에 소량만 허용된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해안의 표정
봄에는 갯메꽃이 바다와 육지 사이를 수놓으며 연분홍 띠를 만든다. 여름은 물빛이 가장 투명한 시기로, 햇빛이 수면 아래 몽돌에 반사되어 춤추는 듯 보인다. 가을에는 갈대와 띠풀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하늘은 더 높고 맑아진다. 겨울의 무명해안은 거칠고 강렬하다. 북서풍이 몰아칠 때 바위 위로 하얀 포말이 솟아오르며, 검푸른 바다가 힘찬 숨을 내쉰다. 계절마다 다른 색과 소리를 기록하는 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즐거움 중 하나다.
해안 근처 작은 부두에서는 어민들이 이른 새벽에 나가 오후에 들어온다. 잡아오는 어종은 계절마다 다르지만, 여름에는 학꽁치, 전갱이, 방어가 많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한 어민은 갓 잡아 올린 학꽁치를 즉석에서 손질해주었다. 바닷물로 한 번 헹군 학꽁치는 씹을수록 은근한 단맛과 해조류 향이 어우러졌다. 마을에서는 회뿐 아니라,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낸 시원한 해물칼국수도 즐겨 먹는다. 여행자는 바닷가 벤치에 앉아 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이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무명해안이 주는 ‘오감의 만찬’이 아닐수 없다다.
무명해안은 상업 시설이 거의 없어 자연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 일부 방문객들의 방문으로 쓰레기를 버리거나 무단 취사를 하면서 문제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필자가 봤던 플라스틱 컵과 음료수 병은 이 해안의 순수한 이미지를 순간 무너뜨렸다. 이곳을 찾는다면 반드시 쓰레기를 되가져가고, 해변 생태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머물러 주기 바란다. 파도와 몽돌, 바위와 해조류는 모두 이곳의 주인이다. 여행자는 잠시 빌린 손님일 뿐이라는 마음을 잊지 않고 주의해주기를 바란다.
무명해안은 이름 없는 해안이지만, 그 안에는 다른 어떤 유명 해변보다 깊고 고요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드론으로 본 그 곡선의 해안선, 저녁 바다에 비친 금빛 물결, 몽돌이 부딪히며 내는 구슬 같은 소리,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미소. 모두가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름철 인파 속에서 벗어나 바다와 온전히 마주하고 싶은 이라면, 무명해안은 그 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고요와 청아함이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곳을 찾는 모든 이가 ‘조용한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무명해안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오래 간직해야 할 바다의 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