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군 중심부, 남계천을 따라 자리 잡은 울창한 숲이 있는데 그 이름은 ‘상림(上林)’이다. 단순한 산책로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이 숲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자,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살아 있는 문화재'라 불릴 만한 역사적·생태적으로 가치있는 숲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상림 숲을 가을 단풍철이나 벚꽃 피는 봄에 찾아 오지만, 내가 이 숲을 찾은 때는 한여름이었다. 기온이 35도를 넘기던 8월 초, 햇볕을 피해 찾은 상림숲은 단지 ‘그늘’이 있는 숲이 아니라 냉기와 고요, 시간의 밀도가 감지되는 감각의 공간이었다.
신라의 숲에서 시작된 1,100년의 시간
상림 숲의 기원은 신라 진성여왕 9년,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남계천은 범람이 잦았고, 그로 인한 민가의 피해가 극심했다. 최치원은 하천의 수량 조절과 홍수 방지를 위해 직접 둑을 쌓고, 수로를 따라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즉, 상림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이 아니라 사람이 치수를 위해 만든 인공의 산림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림은 ‘기능과 감성’을 동시에 지닌 한국적 숲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1,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이곳은 단순히 나무들의 군락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지닌 생태계로 성장했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음에도 수백 종의 식물, 새, 곤충이 자생하고 있으며, 특히 여름철이면 숲 내부 온도는 외부보다 5도 이상 낮게 유지된다.
상림의 여름, 그늘은 온도가 아니라 감각을 바꾸는 곳
내가 숲에 들어섰던 시간은 오전 11시경이었다. 햇빛은 정오로 향하고 있었고, 도로는 이미 아지랑이들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숲 안으로 한 발을 들이자 확연히 다른 시원한 공기가 감지되었다.
입구에서부터 숲은 밀도 높은 그늘로 가려져 있었고, 나무 사이를 통과한 햇빛은 하얗게 퍼지며 실체감을 잃었다. 발걸음이 바뀌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디뎌야 할 만큼 길은 조용했고, 바닥엔 부드럽게 쌓인 낙엽과 흙이 걸음을 흡수했다.
숲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대신, 귀를 막으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지는 자연의 파장을 품고 있다. 작은 물소리,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사운드, 그리고 새 한 마리의 울음소리가 숲 전체를 이완된 리듬으로 감싼다.
나는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에어컨도, 전자음도, 화려한 색채도 없는 이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감이었다.
숲길의 구조, 걷는다
상림 숲은 약 2km가량의 원형 숲길로 구성되어 있다. 하천을 따라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중간중간 설치된 다리나 쉼터 외에는 거의 인공 구조물이 없다.
나는 북쪽에서부터 시작해 남계천을 따라 남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길은 평탄했고, 아이 손을 잡고 걷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 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걷는 것이 단순한 이동이 아닌 감각의 작업처럼 느껴졌다.
왼쪽에서는 하천의 물소리가 일정하게 흐르고, 오른쪽에서는 숲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전했다. 그 가운데에서 걷는 나는 이 두 리듬 사이에 놓인 하나의 조율된 몸이 된 것 같았다.
한 그루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어린아이 둘이 낙엽을 모으고 있었고, 조용히 지나가는 어르신은 양손에 작은 풀꽃을 들고 있었다. 상림은 누군가의 속도를 방해하지 않는 숲이며, 누구에게도 스스로를 강요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숲을 '자연의 휴식처', '도심 속 힐링 공간'이라 부른다. 하지만 상림 숲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언어를 품고 있다.
1,000년 이상 자리를 지켜온 숲은 단순한 쉼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을 질문하게 만드는 곳이다. 속도를 늦추게 하고, 소리를 줄이게 하고, 자신의 몸을 더 조심스럽게 공간에 놓이도록 만든다.
여름 한복판에 이 숲을 걸으며 나는 더위를 피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복잡함을 하나씩 비워내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함양 상림은 가장 오래된 숲이지만 매번 새롭게 걸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번 여름, 속도도 콘텐츠도 아닌 ‘감각’ 하나만을 가지고 숲을 걸어보고 싶다면, 상림으로 방문해보기를 추천한다. 그 기대에 조용히 응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