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부안의 내소사는 봄에는 벚꽃, 가을에는 단풍으로도 이름이 나 있지만, 그 어떤 계절보다 여름의 전나무숲은 조용하고 깊은 울림을 준다. 많은 이들이 ‘전나무숲길’이라 하면 단지 걷기 좋은 산책로를 떠올리겠지만, 실제로 내소사의 전나무숲은 길 자체가 하나의 감성 공간이자 시간의 축이다. 이번 글에서는 여름 장마철에 내소사를 찾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길이 단순한 풍경이 아닌 ‘정서적 공간’으로 작용했던 순간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전나무숲, 걷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지나가는 길
내소사의 전나무숲길은 정문에서 대웅보전까지 약 600미터 남짓으로 이어지는 직선의 길이다. 숫자로 보면 그리 길지 않지만, 걸어보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듯한 기분이 든다. 이는 걸음의 속도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무는 공기와 냄새, 소리 때문일 것이다.
7월 중순, 비가 내린 직후의 숲길은 적막했다. 관광객도 드물고, 입구에서부터 숲의 기운이 짙게 느껴졌다. 전나무는 키가 매우 크고 가지가 높아 하늘을 완전히 가리기 때문에, 한낮에도 숲 안은 어두운 그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그늘은 답답함보다는 차분함과 안정감을 주었다. 걸음을 옮기면 발 아래 흙의 촉감이 젖은 나무처럼 부드럽게 느껴졌고, 들려오는 소리는 단 한 가지, 전나무 잎 끝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톡’ 하고 낙하하는 소리뿐이었다.
이 길을 걸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어느 순간부터는 ‘걷는다’는 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발걸음이 아니라 감각이 이동하는 기분이었따. 앞서가는 사람도, 뒤따라오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숲 전체가 나를 감싸 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나무숲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수식어로는 부족하다. 그곳은 나를 ‘작게 만들고’, 동시에 ‘고요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나무가 주는 방향성
전나무는 직선으로 뻗는다. 가지도 수평으로 길게 뻗고, 수백 년 된 전나무가 줄지어 선 풍경은 마치 고요한 병사들의 행렬을 연상시킨다. 그 풍경은 보는 이의 몸을 반듯하게 만들고, 자세를 고치게 하며, 눈빛을 위로 들게 만든다.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를 자연스레 들게 된다. 전나무의 수직성 때문이다. 나무의 위를 바라보면 빽빽하게 늘어선 잎 사이로 하늘이 아주 조금, 그러나 명확하게 보인다. 그 한 줄기 하늘은 이 숲이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임을 보여주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이 숲길은 단순한 접근로가 아니라, ‘절의 입구로 들어서는 마음의 준비과정’ 같은 길이다. 고요한 경건함은 길을 따라 서서히 깊어지고, 그 끝에서 만나는 대웅보전의 마당은 하나의 도착점이자, 감정이 비워지는 지점이 된다.
전나무숲을 걷는 동안, 나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 시간은 기록보다는 체류에 어울리는 시간이었고, 숲은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느끼기’를 유도하는 공간이었다.
비가 내린 후의 숲은 더 조용해지고, 깊어진다
내소사 전나무숲길은 비가 오고 난 뒤, 그 존재의밀도가 확연히 높아진다. 먼지가 씻겨 나간 공기는 더 맑고,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빗물은 숲 전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듯하다.
비가 지나간 후의 숲은 특유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젖은 흙과 이끼, 나무껍질과 풀잎이 섞인 냄새는 도시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종류의 향이다. 그 향은 걸음을 멈추게 하고, 심호흡을 하게 만든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이 향도, 이 색도, 이 소리도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특별했던 것은, 비 내린 후 이 숲길에 있는 동안에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몇 분을 걸었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숲은 내 안의 시계를 천천히 멈춰세우고, 현재라는 한 지점에만 나를 머물게 했다.
내소사 전나무숲, 조용한 치유의 길
여행은 때로 풍경을 소비하기보다는, 감정을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기도 한다. 부안 내소사의 전나무숲길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독특한 여행지였다. 계절의 특정한 날씨, 특히 여름의 흐리고 비 오는 날에 찾으면 그 진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SNS에서 예쁜 숲길 사진을 찾아 이곳을 찾지만, 정작 이 숲은 ‘기록’보다는 ‘머무름’에 어울리는 장소다. 걷는 동안 마음이 낮아지고, 호흡이 길어지며, 자연이 내는 가장 단순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 조용한 변화는 길을 다 걸은 후에야 비로소 또렷하게 다가온다.
내소사의 전나무숲은 풍경이 아니라 경험이다. 이 경험은 혼자일 때 가장 깊고, 말없이 다녀올수록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는다. 누구에게나 조용한 정리의 순간이 필요한 시기, 그 한 페이지를 이 숲에 맡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