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지리산 국립공원의 한쪽 끝자락을 따라 길게 뻗은 계곡이 있다. 그 이름은 피아골이라는 곳이다. 흔히는 단풍 명소로 더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사계절 내내 이 계곡이 지닌 감각은 색이 아니라 온도, 경치가 아니라 깊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글은 여름 한가운데, 7월 말의 무더위 속에서 피아골을 천천히 걸으며 발 아래 물의 흐름과 바위의 감촉, 그리고 바람이 피부에 닿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여행이 아닌 머무름으로 경험한 그 순간들을 기록한 것이다.
지리산의 틈에서 흐르는 계곡
피아골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오랜 세월 침식과 유동을 반복하며 형성한 협곡형 계곡이다. 하동바위, 직전마을, 연곡사 일대를 거쳐 남천과 합류하기까지 약 10km 이상 계류가 이어지며, 이는 전남 지역에서는 드물게 깊고 긴 계곡의 원형을 갖춘 사례라 할 수 있다.
내가 걷기 시작한 구간은 연곡사 뒤편에 위치한 피아골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하는 구간이다. 초입에는 국립공원 특유의 정갈한 데크가 조성되어 있으나, 불과 몇 분만 걸어도 흙길과 바위길이 혼재된 ‘비정형의 길’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양쪽 절벽은 높지 않지만 숲이 밀도 높게 형성되어 있어 햇빛은 짧은 구간을 제외하곤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다. 이 차광 효과는 피아골의 자연 냉장과도 같다. 도심보다 5~7도 낮은 기온은 계절을 한 달쯤 되돌려놓은 듯한 착각을 주는 곳이다.
발끝으로 흘러가는 여름의 밀도
계곡을 따라 걷다가 나는 발을 담그기에 적당한 지점을 찾았다. 유속이 비교적 느리고 깊지 않은 웅덩이가 형성된 곳이 있따 . 이곳에서 신발을 벗고 바위에 앉아 두 발을 천천히 물속에 들이밀어 보면 엄청나게 차가웠다. 단순히 시원한 정도가 아니라 피부를 움츠리게 할 만큼 깊은 온도였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자 그 냉기는 몸의 피로를 하나씩 떠내려 보내는 듯한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 아래 자갈은 날카롭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마모된 곡선이었다. 물은 맑았지만 투명하지 않았다. 햇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수면에 무늬를 그려 넣고 있었고, 그 무늬는 바람이 불 때마다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앉아 있으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흐름도 바뀌어 놓았다. 시계는 있었지만 더 이상 숫자를 인식하지 않고 있었고, 물소리와 새소리가 하나의 리듬으로 걸음과 호흡을 이끌고 있었다.
피아골의 침묵 설계
피아골에는 국립공원에서 설치한 이정표, 쉼터, 데크길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연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만들어진다. 벤치는 존재하지만 사람은 많지 않고, 화장실은 있지만 음악은 없다. 나는 피아골이 가진 이 조용한 배려에 감탄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더해서 편리하게 만든 곳이 아니라 필요한 것 외엔 아무것도 놓지 않은 모습이 이른바 침묵의 설계였다.
실제로, 피아골에는 관광지에서 흔히 들리는 음악, 방송, 소란, 판매의 소리들이 일체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흙, 물, 바람, 나뭇잎이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피아골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인위적으로 좁히기보다 그 차이를 존중하며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조용한 공존의 사례라 할 수 있다.
피아골은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으며, 시원하지만 자극적이지 않다. 계곡의 깊이는 단지 수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얼마나 조용히 머물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구례의 피아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되, 그 침묵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된 이에게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이번 여름, 에어컨과 화면 속 바다 대신 발끝으로 느끼는 물의 차가움, 숲속 그늘이 주는 감각, 그리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를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라면, 피아골은 그 기대에 조용히 응답할 것이라고 확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