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수많은 올레길과 숲길, 해안 산책로를 품고 있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길은 때로 사람의 발길로 인해 그 고유한 고요를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내문에도, 지도에도, 심지어 일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잘 거론되지 않는 ‘비공식 탐방길’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직접 걸으며 체감한, 제주의 ‘조용한 비공식 탐방길’ 3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길들은 모두 표지판 하나 없이, 자연의 결이 스스로 만들어낸 선형을 따라 형성된 곳들이다.
1. 제주시 오등동, 선녀와 나무꾼 뒤편 협곡길
오등동 일대의 선녀와 나무꾼 테마공원은 복고풍 정원과 전시 공간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뒷편으로는 안내문에 등장하지 않는 좁고 긴 협곡이 숨어 있다. 입구는 울타리 너머의 비포장 오솔길로 되어 있으며, 걸음을 옮길수록 양옆으로는 현무암 기반의 암벽이 다가와 시야가 좁혀지는 길로 들어선다. 이 협곡의 독특한 점은 ‘음향’이다. 바람이 협곡 벽을 따라 흐르며 부드럽게 울리고, 작은 새의 울음조차 긴 여운을 남긴다. 여름 한낮에도 햇빛이 제한적으로 들어와 기온이 평지보다 3~4도 낮게 유지되며, 발 아래의 습기는 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이곳은 등산로라기보다는 감각의 회로를 깨우주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발자국 소리가 돌아오고, 공기의 흐름이 눈에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며, 시간의 속도가 주변과 동화된다. 단, 비가 많이 온 직후에는 바닥이 미끄럽기 때문에 방수 기능이 있는 트레킹화를 착용하고 주의해서 산책하는 것이 좋다.
2. 서귀포시 하례리, 검은 숲길
하례리의 한적한 마을 뒷편, 감귤 창고와 밭 사이로 난 비공식 숲길이 하나 있다. 이 길은 인공 조경의 흔적이 전혀 없고 짙은 숲이 마치 벽처럼 양옆을 감싸고 있어 정오에도 어둠이 머무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신비로운 곳이다.
‘검은 숲길’이라는 별칭은 현무암 돌담과 그 위를 덮은 이끼, 그리고 그늘 속에서 자라난 상록수의 짙은 녹색이 마치 한 덩어리의 어두운 숲을 이루는 데서 비롯됐다. 걸음을 옮길수록 숲의 향기가 진해지며, 공기는 촉촉하고 서늘하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고립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도심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며,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와 자신의 호흡만이 또렷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비공식 탐방로이기에 안전 시설은 없지만, 길이 비교적 평탄하여 가벼운 산책에도 무리가 없는 곳이라 추천한다.
3. 구좌읍 종달리, 해안 절벽 아래의 은폐로
종달리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량이 잘 다니지 않는 작은 갓길이 있다. 그곳에서 풀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현무암 절벽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해안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은폐로는 밀물 때는 접근이 어렵고, 썰물 때만 걸을 수 있는 구간이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시간을 맞춰야 가볼수 있는 곳이다. 길의 한쪽은 바다, 다른 쪽은 절벽으로 거대한 자연의 벽과 물결 사이를 걷는 경험이 가능하다.
절벽에는 바닷바람에 깎인 패임과 구멍들이 있어 파도가 부딪힐 때마다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한 여름에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며, 파도 소리가 발걸음을 일정하게 이끈다. 단, 조수 시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하며 파도가 높은 날에는 진입을 피해야 하니 주의해서 방문하기를 바란다.
제주 여행에서 우리는 종종 ‘유명함’을 안전함과 동의어로 착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도에도, 안내판에도 없는 길이 자연이 주는 가장 본질적인 자유를 선물한다. 오등동 협곡길의 울림, 하례리 검은 숲길의 고립감, 종달리 해안 은폐로의 바람과 파도. 이 세 길은 모두 유명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기에 지켜낸 제주의 또 다른 얼굴이다.
다만 비공식 탐방로는 언제나 안전이 최우선이다. 기본적인 장비와 날씨·조수 확인하고 방문하는것이 필수이며, 자연을 해치지 않는 발걸음만이 이 길들을 오래도록 볼 수 있게 지켜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