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주시 오등동 일대에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복합 문화공간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카페와 정원, 복고풍 포토존을 즐기기 위한 여행지로 알고 있겠지만 사실 이 공간의 진짜 매력은 그 뒷편으로 조용히 이어지는 협곡형 숲길에 존재한다.
이번 글은 정식 안내문에도 등장하지 않고, 대부분의 방문객이 지나치고 마는 '선녀와 나무꾼 뒤편 협곡길'을 중심으로, 직접 걸으며 체감한 지형의 밀도, 공기의 흐름, 그리고 감각의 이완을 경험한 내용을 공개한다.
협곡의 입구를 지나다
선녀와 나무꾼 테마공원의 공식 출입구를 지나 실내 전시관과 외부 정원을 통과하면 복고풍 조형물과 벤치, 포토존이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방문객이 이곳에서 발길을 되돌리지만, 왼편으로 낮은 울타리 너머 비포장 오솔길이 조용히 존재한다.
그 오솔길은 일정한 표지판이나 시설물 없이 자연스레 숲 방향으로 경사져 있으며, 한 걸음씩 디딜수록 바닥의 흙은 촉촉해지고, 양옆의 지형은 점차 협곡형 곡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구간은 제주 특유의 조면암 기반 현무암 지층 위에 수천 년에 걸친 침식과 풍화가 작용하여 좁고 긴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으로, 비공식 탐방로지만 지질학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지형이 만든 자연의 음향 공간
길은 갈수록 점점 좁아진다. 왼편은 바위가 흘러내린 듯한 사면이 있고, 오른편은 완만한 절벽형 언덕이 길을 감싸듯 솟아 있다.
특이한 점은 이 좁은 협곡 속 공기의 ‘음향’이다. 바람이 양쪽 벽면에 부딪히며 반사되고, 작은 새 소리도 울림을 가지고 퍼져나간다. 실제로 이 구간에선 발걸음 소리마저 맑게 울리며, 인공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공간적인 구조가 만들어진다.
햇빛은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내려오지만, 그 양은 제한적이다. 협곡 벽이 만들어낸 음영 덕에 이 구간은 한여름에도 기온이 낮게 유지되어, 습기와 냉기가 동시에 머무는 ‘냉기 포켓’과도 같은 기후대를 형성하여 더위를 잊게 해준다.
나는 이곳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한동안 서 있었다. 그 순간, 귀를 울리는 모든 소리가 자연의 것이었고, 몸의 리듬은 점차 그 공간의 속도에 맞춰졌다.
흙의 경계에서 걷는 사유의 시간
길은 중간쯤에서 완만한 내리막을 지난 뒤 다시 작은 언덕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는 길과 숲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다시 말해, 길이 아니라 '걸어야만 길이 되는 땅'이 시작된다. 바닥에는 오래된 나무 뿌리가 돌출되어 있고, 돌들이 고르지 않게 박혀 있어 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걷는 이의 속도를 천천히 조절하고, 그로 인해 사유의 흐름이 길어진다.
나는 걸음을 멈출 때마다 나뭇잎 하나, 이끼 한 덩어리, 작은 벌레의 움직임까지도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길이 아니라 풍경 그 자체가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되는 순간이었다.
끝자락에는 다시 평탄한 지형이 나오며 작은 개울과 이끼 낀 바위가 등장한다. 물은 흐르지 않지만 습기를 머금은 이 바위는 협곡이 지나간 자리에서 남겨진 시간의 흔적처럼 보였다.
제주의 여행지는 많고, 그 대부분은 이름과 기능이 먼저 존재한다. 그러나 이 협곡길은 이름 없이, 기능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공간이다. 자연의 구조가 만든 음향, 햇빛이 제한된 냉기, 그리고 몸의 속도를 되돌리는 불균형한 지형이지만 그 모든 요소가 단지 풍경이 아니라 감각의 필터로 작동한다.
‘선녀와 나무꾼’이란 이름이 복고적 낭만을 담고 있지면, 그 뒷편 협곡은 시간을 지우고 감각을 복원할 수 있는 조용한 자연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제주 여행에서 사람이 만든 감성보다는 자연이 남긴 구조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 이 협곡길은 소리 없이 그 선택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