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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배론성지 (배론의 시작, 비오는 숲길, 성지)

by think0927 2025. 7. 17.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는 천주교 역사와 순교정신이 깃든 장소로 천주교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장소다. 그러나 정작 이곳을 방문한 이들이 오랜 시간 마음에 남겨두는 것은 유적보다도, 성지를 에워싸고 있는 조용한 숲길과, 그 길을 걷는 동안의 사색과 침묵이다. 이번 글에서는 필자가 여름비 내리던 날에 찾은 배론성지 숲길의 정서적 울림을 중심으로, 이곳이 단지 종교적인 장소를 넘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내면의 회복지’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제천 배론성지 비내리는 성당 모습
제천 배론성지 비내리는 성당 모습

배론의 시작은 풍경이다

배론성지로 향하는 길은 도시에서 점차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시간에서도 멀어지는 듯한 기분을 준다. 제천 시내를 지나 언덕과 논길을 통과해 도착한 성지 입구에는 크고 화려한 간판이나 기념비적 구조물이 없다. 그 대신, 낮은 돌담과 오래된 나무, 그리고 비가 젖은 흙길이 조용히 방문객을 맞이 해준다.

입구에서부터 성지 중심부로 이어지는 숲길은 정돈되지 않은 듯, 그러나 어지럽지도 않은 상태로 자연스럽게 뻗어 있다. 이 길은 누구에게도 조급함을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천천히 걸어도 좋다’는 허락을 건네는 듯한 따뜻한 기운을 풍긴다. 실제로 걷기 시작하면, 세상의 속도가 점차 희미해진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감각을 천천히 열고, 마음속 얽힌 실타래들을 느슨하게 풀어내는 기분이다.

걷는 동안 마주하는 풍경은 단순한 숲이 아니라 성지라는 배경 위에 놓여 있어 그런지, 이 숲은 자연이면서도 동시에 기도하는 듯한 자세를 지니고 있다. 침묵이 이 공간의 본질이며, 그 침묵은 결코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풍성하다. 말보다 조용한 소리, 행동보다 느린 걸음이 더 많이 들리는 공간. 그것이 배론성지 숲길의 진짜 시작이다.

젖은 숲길과 돌계단

비 오는 날의 숲은 본디 무겁기 마련이지만, 배론의 숲은 비로 인해 오히려 가벼워진다. 젖은 나뭇잎은 바람결에 더 유연하게 흔들리고, 축축한 돌계단 위에는 지난 시간들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그 위를 걷는 행위는 마치 시간 속을 거슬러 걷는 일과도 같다.

숲을 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신자들을 위한 묵주기도길과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그 길은 철저히 침묵을 위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길 자체가 말을 대신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풀숲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성상들, 비에 젖은 초록 잎 사이로 빛나는 성모상의 흰색 조각상은 그 자체로 기도문이 되어 버린다.

숲길은 점차 고요함을 넘어 ‘정지된 시간’으로 이끈다. 걷는 동안, 발걸음은 느려지고, 생각은 멀어지며, 오직 눈앞의 풍경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도심이나 일반적인 산책길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렵다. 배론성지는 방문자에게 ‘경건함’을 강요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이들이 자연스럽게 조용해지고, 심지어 무언가에 감사하게 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 공간이 지닌 고요함의 밀도 때문이다. 사람보다 자연이 말이 많고, 자연보다 감정이 더 여유로워지는 그 비율. 그 안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의 울림을 더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정신이 정돈되는 마지막 지점

숲길이 끝나는 곳에는 작은 마당과 성지의 중심 공간이 펼쳐진다.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 옛 교리당, 토굴 성당 등 역사적인 장소들이 있지만, 그 앞에서도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용히 침묵한다. 이곳의 기운이 사람의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비가 그친 뒤, 젖은 기와지붕과 연못 가장자리에 핀 수련꽃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비가 씻어낸 것은 건물 외벽만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두려움, 조급함, 불필요한 생각들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당 한 켠에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 손에 쥔 물 한 병을 마시며 오랫동안 숲에서 나누었던 침묵의 여운을 곱씹었다. 그 침묵은 곧 ‘비움’이었고, 그 비움은 ‘채움’으로 이어졌다. 그 어떤 기념사진보다,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추었던 시간이 나에게는 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배론성지는 풍경이 아니라 체험이다

제천 배론성지는 천주교 성지라는 명칭에 갇히지 않는다. 이곳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열려 있는, 조용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여름비가 내린 후의 숲길은 이 장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특별한 조건이 된다.

나무의 향, 젖은 흙, 조용한 돌계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침묵. 그 조합은 여느 유명 관광지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위로를 건넨다.

사진 한 장 없이도, 한 마디 말 없이도, 이곳은 당신의 마음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진짜 쉼과, 진짜 정리가 필요한 분들에게 배론성지는 그 모든 물음에 가장 조용한 답을 들려주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