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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보은(말티재 숲길, 걷는 숲, 고갯길)

by think0927 2025. 7. 22.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자락 아래 말티재라 불리는 고갯길이 있다. 예로부터 이 길은 속리산을 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소달구지를 끌며 고개를 넘었고, 순례자들은 속리산 법주사를 향해 이 길을 걸었다.

하지만 오늘날 말티재는 더 이상 고생스러운 통과 지점이 아니다. 그 아래 펼쳐진 울창한 숲길이 새로운 의미의 걷는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 이 숲길은 도시의 열기에서 벗어나 숲으로 도망친 이들에게 ‘냉기마저 머무는 자연의 통로’로 작용한다.

이번 글은 필자가 여름철, 습도 높은 오후에 이 숲길을 걸으며 경험했던 정적, 습기, 시원함, 그리고 사색의 순간들을 기억의 흐름대로 기록해보고자 한다.

 

충북 보은 말티재숲길 모습
충북 보은 말티재숲길 모습

숲의 온도보다 깊은 ‘감각의 변화’

말티재 숲길의 시작은 단정하게 정리된 데크 계단부터 시작된다. 관광객들에게는 이 길이 산책로로 보일 수도 있지만 몇 걸음 걸어들어가다 보면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날, 나는 땀으로 옷이 젖어 있던 상태에서 숲으로 들어섰다. 해가 가장 높이 오른 오후 두 시, 아스팔트 위는 34도를 넘기고 있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더위가 들이쳤다.

하지만 숲길 입구를 지나자, 기온이 즉시 달라졌다. 숲이 만든 그늘은 단순히 햇빛을 가리는 정도가 아니라 공기 자체를 식히고 있었다. 잎사귀 사이를 통과한 바람은 살갗에 닿는 순간, 차가운 물안개처럼 흩어졌고 그 느낌은 에어컨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결이었다.

온도가 낮아졌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숲에 들어서자 나의 몸을 감싸던 모든 외부 자극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소음도 줄었고, 눈부심도 사라졌고, 심지어 심장의 박동마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걷는 숲, 멈추는 마음 

말티재 숲길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급하지 않다. 등산로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빠르게 걸을 필요도 없고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목적지도 없다.

그저 걸으면 된다. 걷는 감각이 숲과 동기화되면 우리는 마침내 ‘멈추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나는 중간 지점쯤에 도달했을 무렵 작은 바위 위에 잠시 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걷는 것이 멈추는 것이고 멈추는 것이 걷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새소리는 높지 않고 일정했다. 바람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이 사방에서 다가왔다. 내 숨소리, 옷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나뭇잎이 마주 부딪치는 미세한 떨림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숲의 리듬’처럼 들렸다.

말티재 숲길은 감각의 교정장치였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이 다시금 느리게, 그리고 조용하게 작동하도록 우리 안의 속도를 되돌려 주는 장소였다.

고갯길의 흔적

말티재는 원래 고갯마루였다. 속리산을 넘기 위한 산길로 짐을 진 소나 말이 숨을 고르던 장소였다. 사람이 걸어야만 이동할 수 있던 시절의 흔적들이다.

그 흔적은 숲길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돌로 쌓은 작은 축대,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길의 흔적, 그리고 이정표 대신 놓인 나무 기둥들이 남아있었다.

그날, 여름의 숲은 초록의 밀도로 가득했지만 그 초록 속엔 가을의 고요함도 있었고 겨울의 정적도, 봄의 기척도 함께 있었다.

계절은 바깥 기온이 아니라 숲의 밀도와 리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순간 ‘이 숲이 여름이 아니라면 더 좋았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가 곧 지웠다.

이 숲은 지금이기에 더 특별했다. 사람이 더운 계절을 견디기 위해 조용한 숲으로 들어왔고, 그 안에서 계절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계절을 잊는 공간

보은 말티재 숲길은 잘 알려진 관광지도, 유명한 인스타 핫플도 아니다. 그러나 여름이라는 계절 안에서 조용히 감각을 되돌리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확실한 공간도 없다.

온도는 숫자가 아니었다. 시원함은 에어컨이 아닌, 자연과의 속도 동기화에서 오는 감정이었다. 말티재 숲길은 그 속도와 온도를 우리 안에 다시 정렬시켜준다.

이번 여름, 누구의 목적지와도 겹치지 않으면서 단 하나의 사색으로만 채워지는 길을 걷고 싶다면, 보은의 말티재 숲길을 추천해본다.